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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여행하다 보면 동일한 거리 이름의 거리가 반복되는 것을 알수가 있다

통일이 된 후 거리 이름을 독립투사와 역대 황제,역사적인 사건을 거리 이름으로 채용

베트남의 거리 이름은 베트남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거리 이름만 알아도 대략의 역사를

알수가 있으며 여행시 많은 즐거움이 배가 된다 " 

                                                       

응우엔후에 Nguyễn Huệ

 

나무위키 펌

베트남 대월 말기 떠이썬 왕조의 황제이다. 이름은 응우옌반후에(阮文惠, Nguyễn Văn Huệ)[2],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며, 연호는 광중(Quang Trung, 光中, 꽝쭝)이다. 광중제(光中帝)라고도 불린다.

형제인 중앙황제(中央皇帝) 응우옌반냑(阮文岳, Nguyễn Văn Nhạc), 응우옌반루(阮文呂, 완문려, Nguyễn Văn Lữ)와 함께 떠이썬에서 난를 일으켜 조정을 뒤엎고 떠이썬 왕조를 세웠다. 또한 응우옌푹아인과 손을 잡은

시암 왕국과 청나라의 침공으로 부터 대월을 지켜냈다.

본래는 그의 집안은 원래는 응우옌(阮)씨가 아니고, 호(胡)씨였다. 응우옌씨 정권의 영토인 응에안(Nghệ An)에서 살았지만, 온 집안이 안남의 서산 지역에서 귀양을 가서 거기서 자라 완씨 성을 썼다. 당시 안남 응우옌씨 정권의 무능한 권신인 장복만에 대항하여, 1771년에 응우옌반후에는 형인 응우옌반냑이 일으킨 난에 가담했다. 덕분에 형제들과 함께 안남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았다. 또한 자신의 휘하에 제 발로 각 베트남 지방의 호걸들이 부하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777년, 떠이썬 당은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인 자딘(Gia Định, 嘉定)를 함락하면서 응우옌 정권은 멸망하였고 응우옌푹아인만이 살아 도망쳤다. 이후 응우옌푹아인이 끌고 온 태국의 침공군까지 궤멸시켰다. 응우옌씨 3형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787년에 군을 이끌고 북벌을 하였고, 북부 베트남의 찐씨 정권을 멸망시켰다. 이후 떠이썬 3형제는 베트남 전국을 3등분으로 나누어서 지배하였다.

1787년, 둘째 응우옌반루가 급사하자, 응우옌반후에는 둘째 형의 영토가 무주공산이 되자, 북벌을 감행했고, 북부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였다. 그 일로 인해서 형인 응우옌반냑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1788년, 소통제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떠이선 당을 견재하기 위해서 청나라에게 내부 개입을 요청을 하였고, 청나라는 소통제의 요청에 응해 군대를 베트남으로 파병했다. 응우옌반후에는 베트남으로 침공한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였고, 명맥을 유지하였던 후 레 왕조마저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다. 후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소통제는 청나라로 도망갔고, 떠이썬 왕조는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1788년, 응우옌반후에는 형과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기어이 푸쑤언에서 황제를 칭했다. 이른바 푸쑤언 조정(富春朝廷)의 등장이다. 남쪽의 중앙 황제의 조정은 꾸이년 조정(歸仁朝廷)이라고 불렀다. 떠이썬 왕조에서 푸쑤언 조정이랑 꾸이년 조정이 대립하였지만 푸쑤언 조정이 더 힘이 쎘기에, 이후의 연호는 꾸이년 조정의 태덕(泰德)에서 푸쑤언 조정의 광중(光中, Quang Trung, 광쭝)으로 옮겨가게 된다. 응우옌반후에는 전 베트남의 통일에서 더 나아가 옛 베트남의 고토인 광동, 광서를 수복하고자 하였다.

1788년, 자딘이 도로 응우옌씨에게 넘어가자 응우옌반후에는 응우옌씨의 수장 응우옌푹아인을 토벌하려는 계획했지만, 1792년에 응우옌반후에는 3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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